Time and Money

Thursday, October 14, 2010

2010년 9월

로키마운튼 국립공원에서의 단상

밋밋해 보이는 산들 사이로 문듯문듯 암석절벽이 솟아나온 로키마운튼국립공원은 해발 약 8500피트 높이에 자리하고 있다. 하늘이 더 가까이 맛닿은 곳이라 공기는 서늘하고 같은 햇살이라도 더 눈부시다.

빙하와 빙하가 깎아내린 U자형 계곡과 그 속을 채운 호수와 나무들 그리고 수목한계선 위에 얌전히 깔려있는 풀들과 꽃들, 가끔씩 한가로운 자태를 보여주는 사슴들, 이들이 하늘과 높이 닿은 로키마운튼 국립공원의 모습이다.

대부분 폰데로사 파인이라는 소나무를 중심으로한 침엽수가 가득찬 가운데 마치 화장을 한 듯 하얀색 줄기에 자그마한 동그스런 이파리를 가진 아스핀나무가 군데군데 동아리를 지고 있는 것이 이 국립공원의 특색이다.

바람이 몰아치면 그냥 스쳐보내는 소나무의 무심 속에 이파리 하나마다 바람에 화답하듯 아스라히 흔들리는 아스핀이 겹쳐지는 수풀의 조화는 그대로 정중동의 화폭을 연출한다.

폰데로사 소나무들이 낙엽처럼 갈색이 된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넓은 녹색 화판에 군데군데 갈색나무가 끼여있는 모습이 가을 색깔을 보여줘 더 낭만스럽기도 하다.

정작 이 갈색의 폰데로사 소나무들은 껍질에 서식하는 풍뎅이에게 습격당해 말라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최근 더웠던 겨울 탓에 죽은 나무가 유난히 많아졌단다. 대개는 추운 겨울에 이들 풍뎅이의 알들이 대부분 얼어죽어 그 피해가 적은데 근래에 겨울이 춥지 않다보니 풍뎅이가 기승하게 되면서 고엽이 되는 소나무가 갑자기 많아졌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소나무가 불쌍한 모양이다. 어느 관광객이 공원관리자에게 질문을 한다. 이렇게 죽어가도록 방치하지 않고 풍뎅이를 관리하는 계획은 없는 것이냐고.

항상 듣는 질문인듯 관리자는 미소를 머금으며 답한다. 그냥 자연의 순환인데 인간이 끼여들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소나무를 풍뎅이에서 구해주는 것은 인간 중심의 차별이라는 말이다.

자연에서는 풍뎅이도 소나무도 다 자기자리가 있다. 누가 누구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누구를 위한 당위성이 아니라 그냥 더 적응을 잘하는 생명이 번식을 잘 할다는 현상을 표현한 것 뿐이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고 살아왔다. 더 많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를 꿈꿔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렇게 돼야 하는데, 아니면 이런 사람이 잘돼야하는데 등 선호도를 갖게된다.

그러나 현실은 역시 약육강식이다. 서브프라임을 중심으로 세계경제계를 혼란과 고통에 빠뜨린 월가는 경기부양의 수혜자로 나타나고있다. 이미 자본주의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월가가 자리하고 있어 정치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재산을 가진 집단은 이 기회에도 더 벌 기회를 찾아다니고 있다. 고생하는 것은 없는 사람들이다. 억울해도 현실이다.

푸른 소나무가 풍뎅이에게 점령당해도 그것은 자연의 변화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풍뎅이가 모든 소나무를 다 점령하고 나면 풍뎅이의 서식처가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그 서식처가 없어지면 풍뎅이도 터전을 잃을 것이다.

경제도 자연의 이치처럼 강자가 가장 큰 수혜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강자가 약자를 다 잠식하고 나면 어느날 소나무가 다 없어지듯 경제 자체가 파탄에 빠져 강자도 약자도 다 패배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을 어느 정도 결정하는 지혜로운 존재라면 미래를 보면서 같이 살아가려고 하는 배려는 필요하다. 측은지심의 고차원만이 아니라 강자 스스로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 이익을 위해서도 그렇다.

죽어가는 소나무를 보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어려울 때 상생의 원리로 같이 살아가는 지혜를 갖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너무 무리일까. 빚더미에 얽혀버린 현재의 경제문제를 타개하는 길이 그것 밖에 없어보여서 갖는 바램이다.

로키산의 태고적 고요함은 내 귓가를 맴돌고 바람과 함께 숲속으로 스며간다. 그 억겁의 세월 속에 한 때 화려했다 사라져간 수많은 생명의 소리를 안고서…

2 Comments:

  • 약육강식... 강자의 DNA... 그 정글의 세계를 '측은지심' 혹은 '정의'라고 말하는 'Rule'로 제한해 오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By Blogger Hansin (Scott) Kim, at 3:34 PM  

  • 측은지심도 인류진화학적으로 해석하면 집단의 상호협조력이 강한 종족의 경쟁력의 재생산과정에서 지금까지 갈 수 있는 최고의 진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제는 인간사회가 꼭 협조가 없어도 되는 경우가 혼재해 있다보니 측은지심이 선택적 성향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거지요. 반면에 개미같은 집단에게는 희생이라는 일개미의 원리가 나서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간다는 (적어도 우리 인간의 눈에는) 사실이 덜 헷갈리게 할 거라고 생각해봅니다.

    By Blogger Jack Choi (최운화), at 5:3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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