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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17, 2010

2010년 4월

불황과 ‘무소유’

소유의 고통을 보듬어주었던 ‘무소유’를 쓰신 법정스님이 입적하셨다. 벌써 20년도 넘게 읽혀지는 ‘무소유’는 현대 한국 사회의 정신세계에 가장 영향을 끼친 책 중에 하나다.

아리러니컬하게도 이토록 강한 영향을 남긴 이유는 ‘무소유’를 읽고 위안과 평정을 느끼면서도 실제 무소유를 실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현실에서는 소유를 추구하는 삶이 버겁다고 하더라도 계속 소유를 추구하고 살아야한다는 명제가 실려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의 현대 삶은 300년 전 부터 형성된 산업주의를 시작으로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휩싸여있다. 물질주의와 소비주의는 ‘내’가 누구인가를 내가 ‘가진 것’으로 규정시킨다. 더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보다 낫다는 사고방식이다.

이젠 소유로 사람이 평가되고 대우받게되니 소유를 잃을 지도 모르는 불안감이 자리잡는다. 또 최고점에 있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대적 열등감의 상처를 받게된다. 남이 가지면 가져야하고 남이 가진 것을 못가지면 수치심이 생기고 더 가지면 자부심이 생긴다.

그런데 소유는 언제나 상대적이어서 가질수록 더 많은 소유를 찾게돼 결국은 소유를 위한 노예로 전락하면서 정신적 피로감에 휘말리게 된다. 그렇다고 소유를 놓으면 세속에서 낙오가 되니 감히 끊지도 못한다. 한 마디로 끝없는 번뇌의 사슬이다.

스님이 던져준 위안은 바로 이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번뇌에서 잠시나마 정신적으로 해방을 시켜주는 카타르시스다. 현실에서는 안되지만 피안에서만 가능한 이상향을 ‘무소유’라는 이름으로 제시해 준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무소유’에서 단순한 일시적 카타르시스를 넘어서 물질주의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실제적 방법을 간단하지만 강렬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집착을 줄이고 범죄적 소유를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집착은 소유를 필요 이상의 의미로 가질 때 생긴다고 설명한다. 내가 가진 것은 나와 내 가족과 이웃이 같이 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소유가 필요수단을 넘어서 나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바뀌면 소유가 우리를 소유하고 이 때부터 우리는 집착의 고통에 빠진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말씀을 통해 소유는 삶에 필요한 것 이상의 의미를 주지 않으면 집착을 많이 없애 고통을 줄여준다고 암시하고 있다.

또 스님은 간디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소유는 범죄라는 섬뜩한 말씀을 남긴다. 같은 물건을 두고 다툴 수 밖에 없는 상태를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남의 것을 탐내는 행위는 범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소유에서 벗어나 살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이 집착과 범죄적 소유행위만이라도 다스린다면 평소의 삶이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진정한 나를 돌아보고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은 평범한 우리도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하필 스님의 입적 시기가 이젠 소유마저 내세울 것이 없는 경기침체기다. 그런데 어쩌면 침체기이기에 집착과 범죄적 소유의 틀을 벗어나는 현실적 무소유를 받아들이기가 쉬울 지도 모른다. 무소유는 자발적으로 실천하기는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비록 내 스스로 버리지는 않았을 지라도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씀에서 지금처럼 많은 소유를 잃어버린 시절에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막연히 해본다.

산에 핀 야생화가 아름다운 것은 꽃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 존재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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