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and Money

Thursday, September 04, 2008

2008년 9월

한국정부의 외환개입과 원화의 가치

1992년 독일의 통일은 정치적으로는 축복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독일에게는 통일부담이라는 인플레의 압력으로 다가왔다. 통일전 1990년의 3%대이던 인플레지수가 통일 후 1992년에는 5%에 육박하기에 이른 것이다. 통일독일정부는 인플레를 막기위해 강력한 긴축정책을 시행했고 그 결과 독일의 이자율은 두자리 수까지 급속도로 올라갔다.

독일의 이자율이 오르자 당시 같은 유럽통화체제에 속해있던 영국의 환율에 비상이 걸렸다. 유럽통화체제에서는 유럽내 국가들의 환율이 서로 고정돼있게 협약이 돼있었기에 독일의 이자율이 오르면 독일의 마르크의 가치가 오르게 됨으로써 영국은 환율방어를 해야할 처지에 처한 것이다.

이 환율하락의 압력을 막으려면 독일이 이자율을 낮추거나 영국이 이자율을 올려야하는데 앞서 말한데로 독일은 인플레 때문에 낮출 수 없고 영국은 당시 심각한 경기하강을 겪고 있어 이자율을 올릴 수 없었다.

영국정부는 어떻게든 환율을 방어하려고 노력을 했으나 대세의 흐름앞에 무릎을 꿇고 결국 유럽통화체제에서 영구히 탈퇴하고 영국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감수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이태리도 같은 환율 문제를 겪었고 잠시나마 정부의 노력으로 환율을 방어하려고 애쓰다 다들 손을 들었는데 이 때 이들 국가들은 줄잡아 천억불 이상의 외환시장개입을 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환율사태가 끝난 이후 약 40억에서 50억불의 손실을 입었다.

그 유명한 외환계정위기사건 (Balance of Payment Crises)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투기의 귀재 조지 소로스가 10억불 정도의 이익을 챙긴 것으로도 알려져 대세를 거스리는 환율방어정책이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귀감이 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환율비상이 걸려있다. 년초에는 한국 원화의 가치가 너무 비싸 무역경쟁력에 문제가 있다고 해 원화가치를 떨어뜨리겠다고 정부가 나서더니 3월 부터는 가치가 너무 떨어진다고 달러팔기에 나섰다.

목표치 천원을 중심으로 몇차례에 걸친 개입으로 환율이 안정적인가 싶었지만 다시 8월에 들어 환율은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정부에서 대세에 어긋나는 개입은 안한다는 입장을 취하자 원화가 집중공격을 받으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하락을 하고 있다.

환율시장은 일반 국내경제보다 외국경제까지 영향을 미치는 매우 복잡한 시장이다. 각국의 이자율, 인플레, 국제자금시장, 원자재시장 등 한 국가의 경제당국이 통제할 수 없는 굵직한 변수가 시시각각 영향을 미치는 시장이다. 이런 시장의 변화에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그리고 개입을 하면 대부분 국내시장의 교란만 잃으키게 된다.

거기에 환율시장에 개입하면 환율이 갖고있는 가장 큰 기능인 국가경쟁력과 통화정책의 자동조정기능을 인위적으로 왜곡시킨다. 즉 원화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한국상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고 환율이 떨어짐으로써 가격경쟁력을 회복하게 되며 외국투자자의 입장에서도 투자수익력이 올라 한국으로의 투자가 늘어나게 되는 시장조정기능이 가능한데 인위적 환율시장개입은 이를 방해하는 것이다.

결국 5개월 간의 한국외환당국의 개입은 대세를 거스르는 것으로 판정났고 당국조차도 이제는 대세에 어긋나는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게되었다. 지금이라도 잘 한 결정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지난 몇 달 동안 국내외 환율전문가들이 정부의 개입은 대세를 거스르른 것이라고 지적하는데도 불구하고 개입을 했는가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느다. 몰랐거나 잘못 판단했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그 과정에서 한국의 외환보유고만 줄어들었고 환시장에서 돈을 잃었으며 대세를 벗어나는 환율개입 때문에 환시장의 혼란이 일어나 무역관련 기업들의 손실만 커졌다.

1992년의 유럽의 사례가 다시 생각나는 시절이다. 칼을 가지고 있으면 쓰고 싶다했던가. 당국자가 되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신념에 대한 값 치고는 너무 큰 대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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